법무부에서 변호사시험의 답안 작성 방식을 CBT(computer-based test)로 변경하기로 했다. 로스쿨 도입 초기에도 변호사시험의 CBT 방식으로의 전환 논의는 있었는데, 컴퓨터 기능 오류 및 부정행위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도입이 유보되었다. 그 사이 10여 년이 지나면서 적지 않은 기관들은 CBT 방식의 평가를 도입하였다.
CBT 도입 과정에는 ①수기 작성과 병행, ②CBT로만 진행의 선택 옵션이 있다. 처음에는 수기 작성과 병행을 하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게 되면 수험생들 가운데에는 CBT를 선택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진다. 과거 정부 기관 중 한 곳이 내부 평가로 구두보고서 평가(oral presentation test)를 도입하였는데, 답안을 CBT 방식 또는 괘도로 작성하는 것 중에서 선택하게 하였다. 두꺼운 마카펜으로 2절지에 대고 작성한 뒤 보고하는 것과 컴퓨터로 작성하는 것의 편의성은 당연히 후자가 압도적이다. 그러나, 당시 50대 이상은 자판으로 답안을 작성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선택에 무척 고심했다. 그런데, 군대에서 갈고닦은 실력으로 수십 년간 괘도의 신(神)으로 알려진 응시자 한 분이 과감하게 괘도로 답안지 작성에 도전했다가 낙방한 이후로는 괘도로 작성하는 사람이 완전히 사라졌다.
외국에서는 주관식 서술형 문제에 대해서 수기 작성의 경우 컴퓨터로 작성하는 것에 비하여 좀 더 시간을 배정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대부분 동일한 시간을 배정한다. 수기 작성과 CBT의 유불리에 대해서는 개인 간 편차도 있지만, 작성시간, 작성 답안의 형태, 자판의 상황 등 변수가 매우 많은 편이라 일률적으로 같은 시간을 배정하는 편이다. 시간을 다르게 배정할 경우 자료를 숙지하는 시간에도 편차가 발생한다.
수기 작성은 답안 작성시간이 20~30분 이내로 짧을 때는 좀 더 유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 타자 작성에는 예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답안 작성시간이 1시간 이상을 초과하게 되면 컴퓨터 자판으로 작성하는 쪽의 진행 속도가 더 빠르다. 타이핑에는 종종 가속도가 붙는다. 무엇보다 자료의 양이 많아지면 자료와 자료 간 node 연결점이 많아지면서 작성의 우선순위가 변경될 수도 있고, 작성과정에서 잘못 방향을 잡은 것을 일부 수정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워드로 작성하게 되면 수정 및 자료 순서 변경의 편이성이 극대화되는 장점이 있다. 다만 답안이 박스형의 표로 작성되고 표 안에 많은 데이터를 집어넣어야 할 때는 수기 작성이 유리하고 작성 속도도 유의미한 차이가 느껴질 정도로 빠르다.
나이가 올라갈수록 컴퓨터 작성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손가락 신경이 둔해지기 때문이다. 필자도 30대 때에는 50대 이상 연배분들이 노트북의 자판과 데스크톱 키보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간다. 나이가 든 것인데, 손가락 신경이 그만큼 둔해졌다. 노트북의 자판은 일반 분리형 키보드보다 오타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젊은 시절 우리는 그것을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수험생이 자신의 손가락에 착 달라붙는 키보드를 쓰겠다고 하면 시험장에서 허용해 주어야 할까? 마치 시험장에서 자신의 손가락에 맞는 필기구를 각자 쓰는 것을 허용하듯이 말이다. 허용된다면, 수험생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쾌적 타법이 가능한 키보드를 손수 보따리에 싸 들고 올 것이다.
공부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몇몇 연구 결과들을 보면, 타자의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학교 수업의 필기는 손으로 써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된다. 기억에도 수기 작성이 낫다. 우리 뇌는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로 세상을 변환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날로그 형태로 이해하게 되는데, 수기 작성이 좀 더 이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CBT 도입 기사를 보고 동시에 떠올린 것은 얼마 전 인사혁신처가 필경사 채용에 실패했다는 뉴스였다. 1명 채용에 21명이 몰렸지만, 결국 ‘합격자 없음’으로 채용 절차를 마무리했다. 오늘날 50대 초·중반 이하는 이미 대학 시절 수강 신청을 온라인으로 한 경험이 있고, 리포트를 수기에서 워드로 작성하여 제출해 본 경험이 있는 세대다. 그만큼 깔끔하고 멋진 필체를 가진 이가 드문 세대다.
스티브잡스가 칼리그래피에 몰두했던 것도 그가 아날로그 감성을 어린 시절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오늘날 20~30대는 그런 감성을 경험할 기회조차도 없었다. 4~5살 어린 시절부터 키보드와 자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필경사를 구하기 힘든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까지 일본 법조계는 수기로 서면을 내곤 한다는 말을 듣고 기겁했던 적이 있다. 이미 그 시점 우리나라는 킹스필드와 같이 CD에 담은 판례를 접하고 있던 시기였으며, 법원의 수많은 판결이 워드로 작성되던 때였다.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가 「한글」이라는 의견도 많은데, 동아시아의 문자 중 가장 디지털화하기 좋은 문자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변호사시험에서 CBT로 전환하는 것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김용욱 인바스켓 대표, 변호사
출처 : 법률저널(http://www.lec.co.kr)
위 글은 법률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